그러나 이글을 쓸 당시에도, 원나라의 요청으로 제주도에서 말을 길렀다는 일화가 있는데, 실론섬(스리랑카)에서 말을 기른 흔적은 없었다. 단지 노루가 있었다는 기록과 일치하는 노루는 있었다. 그리고 탐라국은 백제에서 배로 3달을 가야한다는 기록에, 필자가 추정하는 백제(로마제국 일부, 비잔틴제국)로부터 멀리 떨어진 인도남쪽이 가능한 지역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몽고와 고려의 위치에 대한 검토는 하지 못했다. 단지 조선의 세종대왕의 아들 추모영지가 인도북쪽에 있었다는 나무위키의 자료를 참고로 할 때, 이 지역이 제주지역으로 가능하다 생각했다. 또한 제주의 3개성의 귀족들 이야기 (아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자료 참조)등을 고려하면, 타밀지역의 역사와 유사한 것은 긍정적인 요소였다.
그러나 고려시기의 말(馬)의 사역지 흔적이 없는 것은 치명적인 약점이다.
그런데 다른 역사적 연구에서 이태리반도 서쪽에 있는 사르디니야 섬에서 말을 기르는 그래서 종자가 있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사르디냐섬은 여러 가지면에서 우리 역사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판단되었다. 우리의 씨름과 유사한 레슬링의 역사가 있고, 진도개와 같은 watchdog의 종자가 있는 지역이고, 신라의 사도제와 같은 제례 역사가 있고, 장보고의 청해진 중의 하나 (시실리섬과 사르디냐섬)로 판단되었다.
그러나 백제로부터 3개월을 가야하는 탐라국의 위치는 아니다. 그러나 섭라국의 이름과 유사하다. 탐라국과 섭라국이 다른 지역의 나라라면 섭라국의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국내 자료에서는 탐라국, 탐모라국, 섭라국 모두 지금의 제주도라 설명하는 자료 밖에 없다.
아래 탐라국에 대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내용을 보자.
"탐모라국(耽牟羅國)·섭라(涉羅)·담라(儋羅)·탁라(乇羅)라고도 표기되었다. 삼국시대부터 고려 및 조선 초기까지 오랫동안 불려졌던 칭호이다.
《고려사》 지리지에 의하면 제주도 3성(姓) 시조신의 하나인 고을나(高乙那)의 15세손 고후(高厚)·고청(高淸)과 그 아우 등 3형제가 배를 만들어 타고 바다를 건너 탐진(耽津)에 이르렀는데, 이 때는 신라 성시(盛時)였다. 3형제가 들어와 조공하자 신라왕은 이를 가상히 여겨 맏아들에게는 성주(星主), 둘째에게는 왕자(王子), 막내에게는 도내(都內)라는 작호를 주고 국호를 탐라라고 했다고 한다.
이에서 탐라국이라는 명칭은 유래했으며, 실제로는 ‘섬나라’라는 뜻이다. 성립연대는 신라 성시라는 시기가 신라의 삼국통일 이후이므로 문무왕 때로 추측된다. 그 이전의 사회는 3성씨족의 공동연맹체적인 체제로 보이며, 신라의 삼국통일기에 이르러 3성 가운데 세력이 강성한 고씨(高氏) 씨족이 군장(君長)으로 군림해 국주(國主)가 된 것으로 보인다.
설화에 의하면, 처음에는 고을나·양을나(良乙那)·부을나(夫乙那) 등 3성의 시조가 모흥혈(毛興穴, 三姓穴)에서 나타나 그 자손들이 나라를 이루고 살았다고 한다. 기록에 의하면, 사람은 키가 조금 작고 언어는 한(韓)과 같지 않으며, 개나 돼지의 가죽으로 옷을 만들어 입고, 소와 돼지를 잘 기르며 또 노루와 사슴이 많으며, 풍속은 질박하고 비루하며, 여름에는 초옥(草屋)에 살고 겨울에는 굴실(窟室)에 산다고 한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의 한조(韓條)에는 “주호(州胡)"라고 지칭하면서 배를 타고 중국과 한(韓)에 내왕하며 교역을 한다고 하였다. 최근에도 오수전(五銖錢)·화천(貨泉) 등의 중국화폐가 발굴되었다.
대외관계는 제일 먼저 지리적으로 가장 가까운 백제와 밀접해 476년(문주왕 2) 4월에 사신을 파견해 방물(方物, 토산물)을 바치고 그 사신은 좌평(佐平)의 관등을 받았다. 498년(동성왕 20) 8월에는 공부(貢賦)를 바치지 않다가 백제동성왕이 친히 정벌하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 사신을 보내어 사과하고 공부를 바칠 것을 약속하였다.
고구려와는 가옥(珂玉)을 수출하는 등 교역을 했으나 백제에 복속된 이후로는 교섭이 두절되었다. 한편, 신라와는 662년(문무왕 2) 2월에 탐라국주 좌평 도동음률(徒冬音律)이 와서 항복함으로써 이때부터 신라의 속국이 되었다. 그리고 뒤에 일본과 가깝게 지내다가 678년 2월에 신라 사신의 경략을 받았다. 이 뒤로는 신라와 활발하게 교섭하였다.
한편, 중국 당나라와는 661년 8월에 왕 유리도라(儒李都羅)가 사신을 보내기도 하였다. 또, 일본과는 661년 당나라에서 귀국하던 일본사신의 배가 풍랑을 만나 탐라국에 대피했다가 귀국할 때, 왕자 아파기(阿波伎) 등 9명이 이들을 따라 일본에 간 일이 있은 뒤로 매우 교섭이 활발해 많은 왕자와 좌평이 일본을 다녀왔다. 또 680년 9월과 686년 8월에는 일본에서 사신이 왔다는 기록도 있다.
신라 말기에는 점차 복속관계에서 벗어나, 신진세력인 고려에 우호관계를 맺고자 하여 925년(태조 8) 11월 사신을 파견해 방물을 바쳤다. 938년 12월에는 탐라국주 고자견(高自堅)이 태자 말로(末老)를 파견해 입조하고, 고려로부터 신라의 예에 따라 성주·왕자의 작위를 받아 고려의 번국(蕃國)으로서 독립적인 체제를 유지해 나갔다. 그 후 1105년(숙종 10)고려의 지방행정구획인 1개의 군(郡)으로 개편되면서 반독립적인 체제는 사라졌다.
1153년(의종 7) 탐라군은 다시 격하되어 탐라현이 된 뒤로는 고려조정으로부터 파견된 현령이 탐라의 행정업무를 관장하게 되었다. 이에 탐라국 체제는 없어지고, 성주와 왕자의 관직만이 남아 상징적 존재로 유지되었다.
조선이 건국된 뒤 1404년(태종 4) 5월에 성주는 좌도지관(左都知管), 왕자는 우도지관(右都知管)으로 개칭되어 존속하다가, 1445년(세종 27) 6월에 이것마저 폐지되어 이 때부터 탐라의 귀족계급은 완전히 평민화되었다."
(자료 : 탐라국,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상기 기록중에서 "사람은 키가 조금 작고 언어는 한(韓)과 같지 않으며, 개나 돼지의 가죽으로 옷을 만들어 입고, 소와 돼지를 잘 기르며 또 노루와 사슴이 많으며, 풍속은 질박하고 비루하며, 여름에는 초옥(草屋)에 살고 겨울에는 굴실(窟室)에 산다고 한다."는 내용은 사르디냐섬의 내용과 일치하는 것으로 보인다. 왜인이 아닌가 추정된다.
Map of Sardinia Island location (Red)(source : Wikipedia)
또한 아래 내용과 같이 위의 기록에서 '주호국'의 이름이 지칭되는 것은 영락없는 사르디냐섬의 언급이다. 필자는 마한의 서쪽에 있는 주호국을 사르디냐로 추정했다. (아래 글 참조)
"《삼국지》 위서 동이전의 한조(韓條)에는 “주호(州胡)"라고 지칭하면서 배를 타고 중국과 한(韓)에 내왕하며 교역을 한다고 하였다"
원나라 시기에 원나라의 요청에 의해 고려는 말을 제주도에서 길렀다 한다. 그런데 이러한 말의 사육과 관련한 내용은 탐라국으로 추정되는 스리랑카에는 없다. 그러나 섭라국일지 모르는 사르디냐에는 이러한 내용이 존재한다. (아래 자료 참조)
"Sardinia boasts ancient equestrian traditions and is the Italian region with the highest number of horse riders (29% of population)[201] "...............
그렇다면, 원나라와 고려가 이 주위에 있었던 것일까? 필자는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필자는 중국의 역사적 위치를 프랑스지역으로 추정한다. 따라서 원나라는 중국사 지역에 있으므로 프랑스지역에 있었을 것이다. 서양사는 몽골군이 여기까지 진출한 것을 숨기고 있지만, 주위 역사를 보면 그러할 가능성이 매우 많다. 필자는 신성로마제국의 역사에서 요나라의 역사가 숨겨 있는 것을 보았다. (아래 글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