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고구려 광개토태왕이 백제의 각미성(광개토태왕 비문 속의 이름)(관미성:삼국사기 속의 이름)이 어디인지 궁금하였는데, 최근 광개토태왕이 점령한 성들의 위치를 찾는 과정에서 드디어 각미성을 찾았다고 확신한다. 그 위치는 놀랍게도 영국의 서쪽해안에 있는 Wales지역의 Caer Gybi fort 이다.
이는 우리에게 놀라운 많은 점을 시사한다. 즉 백제가 서로마제국의 영토를 모두 가지고 있었다는 의미이며, 백제와 고구려의 역사에서 말하는 서해는 대서양이 된다. 또한 이는 프랑스지역의 Gaul지역에 4세기말 5세기초 시기에 중국이 없었고, 백제와 고구려의 전투지역이었다는 것이다. 수와 당으로 추정되는 프랑크왕국은 이후 점진적으로 벨기에, 네델란드지역에서 내려와 미구에는 프랑스지역을 점하여 프랑크왕국을 세운다. 즉 수 당이전의 중국 역사는 허구라는 것이다. 이러한 놀랄만한 의미를 지닌 각미성에 대해 알아 보자.
II. 본 론
Fort Gybi라는 이름이 남아있는 것에 또한 감사와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웨일즈인들의 자부심에서 이 이름을 바꾸지 않고 보존한 것으로 판단된다. 서양사에서 대부분의 지명들은 Saint를 붙여 지명을 바꾸어 놓은 것을 많이 보아 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애써 광개토태왕 시기의 게르만족의 이동 역사가 지역에 있었다는 것을 감추려 하기 때문이다. 한 줄이라도 언급하면 다행이다. 그러나 필자는 끈질긴 노력 끝에 이러한 역사 감추기의 흐름에서 각미성을 찾아 기쁘다.
1. 로마의 성이었던 Fort Gybi
우선 Fort Gybi가 로마시대부터 있었는지가 확인되어야 한다. 12세기 이후에 건축했다는 성들이 많기 때문이다. 또는 로마시대 성곽위에 개축했다는 말이라도 있어야 한다. 그런데 Fort Gybi는 이러한 역사 감추기에서 예외로 해당한다. 아래 내용을 보자.
Gybi성은 3세기나 4세기에 로마 웨일즈에 수군기지로 세운 작은 요새성이다. 웨일즈 Anglesey 카운티의 Holyhead 중앙에 위치한다. (Anglesey county는 웨일즈에 접한 섬으로, Holyhead는 Anglesey섬에 접한 Holy Island 섬에 있는 위치이다. 아래 지도 참조)
Caer Gybi 위치 (Holy Island, Isle of Anglesey, Wales)
History
The exact date of the fort's construction is unknown, but it is believed to have been built between the late 3rd-century or early 4th-century. It is thought to have been a smaller outpost of the larger Segontium fort, which was used to defend the west coast against Irish sea-raiders. The Romans also built a watch tower, within Mynydd y Twr on the top of Holyhead Mountain, which was possibly used as the fort's look-out point.[1]Both were possibly abandoned around 393, when the troops were sent to respond to the revolt of Eugenius of Gaul.[3]
이 요새의 정확한 건축날짜는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3세기말이나 4세기초 사이에 세워진 것으로 믿어진다. 이는 보다 큰 Segontium 요새의 보다 작은 전초기지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Segontium요새는 아일랜드 해적에 대항하여 서쪽해안을 방어하는 곳이다. 로마인들은 또한 Holyhead 산의 정상에 감시탑을 세웠다. 이는 아마도 성의 감시지점으로 사용되었을 것이다. 이 모두가 약 393년 쯤에 포기되었는데, 이때는 Gaul지역(프랑스지역)의 Eugenius반란에 대응하기 위해 군대가 보내진 시점이다.
로마군이 Gybi성을 포기한 시점인 393년쯤은, 광개토태왕이 392년 백제의 관미성, 수곡성을 함락하고 ( 백제 진사왕 시기), 393년 아신왕(백제)의 관미성 공격을 격퇴시킨 시기와 거의 일치한다. 아신왕은 394년 수곡성을 다시 공격하나 고구려에 패배한다. (아래 자료 참조).
프랑스지역(Gaul)으로 군대를 보내서 잉글랜드지역을 포기했다는 상기 위키 설명은 잉글랜드지역에서 패배한 역사를 감추기 위한 설명으로 판단된다. England지역은 로마제국이 410년이후 완전히 상실한 지역이다. 서로마제국이 완전히 망한 427년이후 잉글랜드, 이베리아반도, Gaul지역(프랑스지역), 이태리반도지역이 로마제국이 상실한 영토지역이다. 이베리아반도, Gaul지역, 이태리반도는 고트족이 차지한 지역이다. 필자는 고트족이 고구려라 추정했다. 잉글랜드지역도 고구려 광개토태왕이 차지한 지역일 것으로 필자는 추정한다. 이러한 추정의 첫 단계가 웨일즈 지역에 있는 각미성의 확인이다.
** 진사왕(385-392)
392 : 광개토왕이 관미성 함락시킴
** 아신왕 (392-405)
393 관미성 공격했으나 퇴각함
394 수곡성 공격했으나 실패
(자료 : 삼국사기, 나무위키)
3. Gybi성의 모습과 고구려 성곽
아래 Gybi성 모습은 원형의 Tower가 있다. 원형의 Tower는 고구려가 점령한 후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백제는 원형 Tower를 만들지 않았다.
Caer Gybi Fort Remains (Holy Island, Isle of Anglesey, Wales) (source : Wikipedia)
4. Holy Island 의 종교적 성지
A map showing the Isle of Anglesey and Holy Island (Native name:Ynys Gybi)
Holy Island (Welsh: Ynys Gybi, 'the island of (Saint) Cybi') is an island on the western side of the larger Isle of Anglesey, Wales, from which it is separated by the Cymyran Strait. It is called "Holy" because of the high concentration of standing stones, burial chambers and other religious sites on the small island. The alternative English name of the island is Holyhead Island.
Holy Island (웨일즈어 : Ynys Gybi, 'the island of Gybi')는 보다 큰 Anglesey섬의 서쪽에 있는 섬이며, Cymyran 해협으로 분리되어 있다. 성스럽다고 불리는 이유는 이 조그만 섬에, 서있는 돌들, 묘지, 그리고 다른 종교적 장소가 몰려 있기 때문이다. 이 섬의 다른 영어이름은 Holyhead Island이다.
Holyhead in Holy Island, Isle of Anglesey, Wales
Pre-history of Holy Island
The settlement of Holy Island, Anglesey is dated to c. 4,000 BC with the discovery of an original Neolithic long house. The long house is similar to those found in Scotland and elsewhere in the British Isles.[1][2][3] Also near the Neolithic site on the middle of Holy island is the Bronze Age Ty Mawr standing stone (Menhir), which is a Monolith measuring 2.67m high (8 feet).[4][5]
Anglesey에 있는 Holy Island의 거주는 원래의 신석기시대 long house가 발견되면서 기원전 4000년으로 올라간다. 이 long house는 스코틀랜드와 다른 British 섬들에도 유사한 것이 발견된다. Holy island 중앙의 신석시대 유적지 근처에 청동기시대 Ty Mawr standing stone(Menhir)가 있는데, 단일암석으로 높이가 2.67m가 된다. (아래 사진 참조)
Ty Mawr standing stone, Holyhead
Permanent settlement on Anglesey was established in different forms for thousands of years from after the Bronze Age. Many of these sites were used from Neolithic times. This was proven by pottery discoveries. There are ancient hillforts that were in use for nearly a millennium until the Roman invasion of Wales.[7]
Anglesey에의 영구적 거주는 청동기시대이후 수천년에 걸쳐 다른 형태로 이루어졌다. 이들 중 많은 장소는 신석시대의 것이다. 이것은 도자기의 발견으로 증명되었다. 로마가 웨일즈를 침범하기 전에 거의 천년을 거쳐 이용된 고대 hillforts(언덕위 요새)가 있다.
(source : Holy Island, wikipedia)
고대로부터 있어 온 종교행사지역이며, 요새로서 켈트문명지역이 아닌가 한다. 필자는 켈트문명이 고조선의 그것으로 추정한다. 그래서 Holy Island인지 모른다. 영어 이름은 Holdhead island라 하는데, 전략적으로 서해를 감시하기 좋은 위치라서 Holy란 표현이 있는지도 모른다.
5. Holy Island의 지형적 조건과 각미성의 지형 조건
Whilst most of the coastline is rocky, there are sandy beaches at Trearddur Bay and Penrhos Country Park. Due to its rocky nature the island has seen many shipwrecks through the years.
대부분의 해안선은 암석으로 되어 있는 반면, Trearddur Bay와 Penrhos County Park는 모래사장 해안이다. 암석들이 많은 지형으로 인해, 이 섬은 여러 해동안 많은 난파선이 있었다.
(source : Holy Island, wikipedia)
그런데 상기 섬의 지형에 대한 중요한 언급이 있다. 즉 주위가 암석으로 되어 있어 배가 난파하는 일이 자주 있었다는 것이다. 이는 각미성이 주위가 절벽으로 되어 있다는 기록과 일치한다. (아래 자료 참조)
冬十月, 攻䧟百濟關彌城. 其城四面峭絶, 海水環繞, 王分軍七道, 攻撃二十日, 乃拔.
겨울 10월에 백제 관미성(關彌城)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그 성은 사면이 가파른 절벽으로 바닷물이 둘러싸고 있어 왕이 군사를 일곱 길로 나누어 20일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삼국사기고구려본기 광개토대왕 원년[4]
(자료 : 광개토왕/생애, 나무위키)
실제 이 섬 주위의 해안을 보면 아래와 같이 험준하다. 즉 지형적으로 각미성의 조건을 만족시킨다. 이는 매우 드문 지형이므로 매우 중요한 결정적 조건이다.
Holy Island coast (source : Wikipedia)
Holy Island coast
Holy Island coasts
6. Fort Gybi의 모성인 Segontium Fort
Holy Island에 있는 Fort Gybi 바로 뒤에는 더 큰 모성이 있다. 즉 Segontium Fort 이다. 이 성은 Holy Island에 접한 Anglesey 섬 끝에 접해 있다. 필자는 이 성도 각미성의 일부가 아닌가 한다. 7개의 진로를 택해 20일간 전쟁하여 확보했다는 각미성이 Holy Island만으로는 너무 한계적인 것으로 판단되기 때문이다. Segontium Fort는 발음상으로는 수곡성으로 추정되나, 수곡성은 375년 이미 소수림왕시 점령했으므로, 바로 가까이 있는 각미성(Gybi Fort)이 392년 점령된다는 추리는 합리적이 아니다. 그러나 광개토태왕이 각미성을 공격할 때, 수곡성도 함락하였다는 아래 나무위키 자료가 사실이라면, 수곡성이 가능성이 더 크다. 그리고 이는 소수림왕시 점령한 수곡성을 백제에게 다시 그 후 빼앗겼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Segontium Fort도 더 살펴 보고자 한다.
"원래는 백제의 북방을 지키던 천혜의 요새[3]로, 사면이 가파른 절벽에다 바다에 둘러싸인 구조로 그야말로 난공불락의 철옹성이었다. 하지만 고구려광개토대왕 1년(391) 겨울 10월에 광개토대왕이 직접 백제를 침공하여 수곡성 등 백제 북방의 성들을 함락시켰을 때 관미성 역시 공격하였고, 일곱 방향에서 20일 동안 밤낮으로 성을 공략한 끝에 결국 관미성을 함락시켰다."
(자료 : 관미성, 나무위키)
"History
Roman
Segontium was founded by Agricola in AD 77 or 78 after he had conquered the Ordovices in North Wales. It was the main Roman fort in the north of Roman Wales and was designed to hold about a thousand auxiliary infantry. It was connected by a Roman road to the Roman legionary base at Chester, Deva Victrix. Unlike the medieval Caernarfon Castle that was built alongside the Seiont estuary more than a thousand years later, Segontium was situated on higher ground to the east giving a good view of the Menai Straits.
AD 77-78년에 로마가 세운 성이다. 로마 웨일즈 북쪽에 있는 주요 로마 요새로서 약 천명의 보조 보군이 주둔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다른 로마 기지 Chester, Deva, Victrix로 이어지는 로마 길에 연결되어 있다. 천년 후 Seiont 강 하구에 세워진 중세의 Caernarfon Castle과 달리, 높은 언덕 위치에 있어 Menai 해협(Anglesey 섬과 Gwynedd county사이)을 감시하기에 좋은 위치에 있다.
Segontium Fort location in Gwynedd county, Wales
The original timber defences were rebuilt in stone in the first half of the 2nd century. In the same period, a large courtyard house (with its own small bathhouse) was built within the fort. The high-status building may have been the residence of an important official who was possibly in charge of regional mineral extraction. Archaeological research shows that, by the year 120, there had been a reduction in the military numbers at the fort.[3] An inscription on an aqueduct from the time of the Emperor Septimius Severus indicates that, by the 3rd century, Segontium was garrisoned by 500 men from the Cohors I Sunicorum, which would have originally been levied among the Sunici of Gallia Belgica. The size of the fort continued to reduce through the 3rd and 4th centuries. At this time Segontium's main role was the defence of the north Wales coast against Irish raiders and pirates. Coins found at Segontium show the fort was still occupied until at least 394."
120년 이후 점차 병력의 수가 줄어 들어 3세기에는 500명정도의 군이 주둔했다. 3-4세기에 걸쳐 보다 주둔 인력이 계속 줄어 들었다. Segontium Fort의 주요 임무는 아일랜드 raider and pirates에 대항하여 북웨일즈 해안을 방어하는 것이었다. Segontium에서 발견된 동전은 적어도 394년까지 주둔하였다는 것을 보여 준다.
[출처] <펌>Segontium (fort) - wikipedia|작성자 CG Park
즉 북웨일즈 해안을 지키는 역할을 하는 성이었으므로, Gybi Fort와 함께 주요 성곽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394년까지 로마군이 있었다는 것도 관미성의 함락 시점인 392년과 유사하다. 그렇다면 Anglesey Isle의 주위 해안도 Rocky Cliffs인지 확인해 보자. 아래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역시 Anglesey 섬 주위 해안도 절벽으로 이루어져 있다. 따라서 Segontium Fort 도 관미성의 일부로 볼 수 있다. 7곳으로 공격해 20일 후에 점령한 지역은 Holy Island의 자그만 섬이라기 보다는 Isle of Anglesey 전체섬으로 고려할 수도 있다.
Coast of Isle of Anglesey, Wales
Isle of Anglesey 섬 위치
그런데 이 Segontium Fort 는 Remains만 남아 있다. (아래 사진 참조) 이 주위에 12c 들어 Caernarfon Castle을 세웠다. (사진 참조) 그러나 역시 전형적인 고구려 성곽 모습이다.
Segontium Roman Fort Ruins (source : Wikipedia)
Caernarfon Castle Aerial View
"The first fortifications at Caernarfon were built by the Romans. Their fort, which they named Segontium, is on the outskirts of the modern town.[4] The fort sat near the bank of the River Seiont; the fort was probably built here due to the sheltered position and because it could be resupplied via the river Seiont.[5] Caernarfon derives its name from the Roman fortifications. In Welsh, the place was called y gaer (lenition of caer) yn Arfon, meaning 'the stronghold in the land over against Môn'; Môn is the Welsh name for Anglesey.[4]Little is known about the fate of Segontium and its associated civilian settlement after the Romans departed from Britain in the early 5th century.[5]
[출처]<펌>Caernarfon Castle(Wales)-wikipedia|작성자CG Park
상기 자료에서 마지막 귀절은 Segontium Fort가 로마가 Britain을 5c 초 떠난 후 어떻게 되었는지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한다. 즉 위에서 살펴 본 394년이후 로마 동전이 없었다는 것과 같은 상황이다. 즉 고구려에 의해 함락된 후 계속 고구려에 의해 지배되었다는 것이다. 필자가 추정한 각미성의 상황과 유사하다. 그러나 위에서 나무위키 자료에서 나오는 수곡성, 관미성을 동시에 공격하였다는 것을 고려하면, 수곡성과 관미성이 멀리 있지 않다는 것을 추정할 수 있고, 이 경우에는 Segontium Fort는 수곡성일 가능성이 높다. 아래 자료에서는 수곡성 전투가 375, 394, 502년에 있었다. 394년 전투에서 고구려가 방어한 것이라면 375년 또는 391년에 확보한 수곡성이 고구려 영역이었다는 것을 말해 준다.
502년 문자왕 시기의 수곡성 전투는 백제의 무령왕과의 싸움이다. 무령왕은 523년 한성(漢城)을 행차한 것으로 삼국사기는 말한다. 필자는 이 한성이 프랑스의 Clermont-Ferrand 이라 추정했다. (아래 필자의 글 참조) 이는 문자왕이 507년 한성을 공격하려 하다 실패하고 횡악에서 싸우다 말았다는 내용에서 확인한 것이다. 횡악은 피레네산맥을 말하는 것으로 추정했다. 백제 진사왕이 서해 큰 섬에서 사냥하고, 횡악의 서쪽에서 사냥했다는 내용은, 아마도 대서양의 큰 섬인 잉글랜드지역의 어디에서 사냥하고, 피레네산맥의 서쪽방면에서 사냥했다는 것이 된다. 즉 이러한 상황을 고려하면 수곡성이 대서양에 있는 것이 자연스러운 상황이다.
아래 광개토태왕의 연도별 활동을 잠시 보자. 392-394년기간에는 관미성, 수곡성 전투가 있었다. 이 시기에 로마제국은 상기 Fort Gybi에서 철수했다고 했다. 즉 연도로 보아서도 관미성이 Fort Gybi임이 확인된다. 그럼 관미성 함락이후 고구려가 관리하고 있었다는 것이 된다. 그래서 로마군이 떠난 후 관미성인 Fort Gybi지역은 어떻게 서양사에서 설명되고 있는가가 궁금해진다. 게르만족의 활동이 이 지역에 있었는가는 의도적으로 감추는 경향을 보인다. 그리고 이 시기에 기독교가 전파되었다는 이야기만 잔뜩하고 있다. 물론 기독교 자료외에는 자료가 없어서 그럴 수도 있지만, 유럽의 모든 지역에서 보면 의도적인 경향이 보인다. Babarians이라는 통칭으로 얼버무리는 경우가 대다수이다. 그래도 필자는 약간의 편린을 본다.
** 광개토태왕의 백제 관련 활동기록
391년(영락 원년)
5월,고국양왕사망 후 즉위. 스스로영락대왕(永樂大王)이라 칭하고연호를영락(永樂)으로 정함. 《광개토대왕릉비》, 《삼국사기》
백제 북부 변경 공격, 석현성(石峴城) 등 10여 개 성 함락. 《광개토대왕릉비》, 《삼국사기》
이 당시 필자가 고구려의 그것으로 보는 고트족의 활동은 Gaul지역, 이베리아반도지역, 이태리반도지역, 발칸반도지역에 한한다. 바다 건너 England, Wales, Ireland로 갔다는 언급은 없다. 반면 6세기 중간에 Anglo-Saxon이 England로 이주한다는 것이 전부이다. 이중에는 Danes족도 포함된다고 언급된다. 이들이 게르만족의 이동이라 하지만, 410년이후 로마군이 철수한 이후 설명이 부족하다. 단지 Irish pirates raids(아일랜드인들의 해적행위)로 넘길 뿐이다. 그래서 필자는 아일랜드쪽의 상황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고구려의 광개토태왕이 아일랜드쪽부터 확보하고 이들 쪽에서 관미성 등을 공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스코틀랜드의 picts인들은 스키타인들이라 한다. 스키타인들은 흉노로 보이며, bc 12세기부터 고조선의 일부를 이룬 세력이다. 필자는 Angles족의 왕이 훈족 출신이라는 것을 밝힌 바 있다. Danes족도 단군조선의 세력이라 밝힌 바 있다. Saxon족은 숙신족으로 추정되며, 숙신족은 광개토태왕시 정벌의 역사가 있었다. 따라서 전적인 자료는 찾기 힘들더라도 일부 편린을 찾으면 감추어진 역사가 밝혀질 수 있다고 본다.
필자는 아일랜드 역사에서 Red Hand로 상징되는 Niall왕의 이야기가 광개토태왕의 이야기를 옮긴 것이 아닌가 한다. 411년 죽었다는 기록을 가진 Niall왕이 Nine Hostages를 가졌다는 이야기에서 5명은 아일랜드의 다섯개지역에서 1명씩, 4명은 스코틀랜드지역에서 또는 스코틀랜드, Saxons지역, Britons지역, Franks지역에서 각각 1명씩 4명을 볼모로 받았다는 기록이다. (아래 자료 참조) 이는 광개토태왕의 이야기라면 아일랜드, 스코틀랜드, Saxons지역, Britons지역, 프랑크지역에 모두 진출했다는 것이 된다.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이다. 특히 수군을 몰고 정복활동을 많이 한 광개토태왕이 충분히 가능한 것이다. 우리는 광개토태왕 비문에 나타난 성들을 찾으면 이것이 역으로 증명되는 것이다. 각미성의 확인은 이러한 의미에서 매우 큰 의의가 있는 것이다.
"There are various versions of how Niall gained his epithet Noígíallach. The saga "The Death of Niall of the Nine Hostages" says that he received five hostages from the five provinces of Ireland (Ulster, Connacht, Leinster, Munster and Meath), and one each from Scotland, the Saxons, the Britons and the Franks.[21] Keating says that he received five from the five provinces of Ireland, and four from Scotland.[9]
그리고 웨일즈 지역의 Gwynedd왕국이 401년부터 시작하는 것에 주목하여 살펴보고, 웨일즈 중서부의 Dyfed지역의 왕국도 410년 시작한 것에 주목하였다. 아래 자료에서 보면 이들 두 왕국은 모두 401-410년 사이에 세워진 왕국인데, 모두 아일랜드에서 건너 온 사람들이 왕국을 세운 것으로 설명된다. 위에서 필자가 추정한 아일랜드 먼저 정복한 후 웨일즈 방향으로 공격하지 않았나 하는 것과 일치하는 기록이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잉글랜드(Britons지역), 스코틀랜드도 광개토태왕이 확보한 지역이 아닌가 한다. 단지 정복후 볼모를 받고, 속국으로 삼은 것일 수 있다.
Ptolemy in the 1st century marked the Llŷn Peninsula as the "Promontory of the Gangani",[26] which is also a name he recorded in Ireland.It is theorised in the 1st century BC some of the Gangani tribe may have landed in what is now the Llŷn Peninsula and had driven out the Deceangli or the Ordovices tribe from that area either peacefully or by force. In the late and post-Roman eras, Irish from Leinster[19] may have arrived in Anglesey and elsewhere in northwest Wales with the name Llŷn derived from Laigin, an Old Irish form that means "Leinstermen, or simply Leinster."[27]
The Kingdom of Dyfed (Welsh pronunciation:['dəvɛd]), one of several Welshpetty kingdoms that emerged in 5th-century sub-Roman Britain in southwest Wales, was based on the former territory of the Demetae (modern Welsh Dyfed). The royal line was founded by Irish settlers in the 5th century
In the year 360, a sudden series of coordinated raids by the Irish, Anglo-Saxons and Picts began. These continued as the Irish colonised the Isle of Man, and resulted in a short period lasting until the 5th century during which Old Irish was spoken in the region: twenty stones dated to this period have ogham inscriptions. One bilingual Latin-Irish stone in Castelldwyran, near Narberth, has the name Votecorigas written on it; the wordier Latin inscription is Memoria Voteporigis Protictoris, giving him the title "protector", a late Imperial Roman title given to nobility.[2]
The medieval Irish narrative The Expulsion of the Déisi attributes the kingdom's founding to Eochaid, son of Artchorp, who was forced across the Irish sea in the 5th century; his descendants founded the line of the kings of Dyfed down to "Tualodor mac Rígin" (Tudor map Regin).[3]
아일랜드, 스코틀랜드, Britons지역에 대한 자세한 연구는 후일을 기약하고자 한다. 너무 긴 이야기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III. 결 론
각미성은 그 위치의 지형적 특징 (사방이 절벽으로 둘러 쌓인 곳)으로 인하여 오히려 용이하게 찾을 수 있는 것인데, 결국 수소문 끝에 Fort Gybi(Wales)를 찾았다. 그리고 Fort Gybi 요새가 있는 Holy Island에 접한 Anglesey섬이 있는데, 이 섬과 접한 지역에 더 큰 성으로 보이는 Segontium Fort이 있었는데, 지금은 일부 흔적만 남아 있다. 웨일즈의 중서부에는 가루성으로 보이는 Carew Castle이 있다. 이들 지역은 모두 해안이 Rocky cliffs로 둘러 쌓인 지역이다. 필자는 한때, 크리미아반도에 있는 성이 각미성이 아닌가 했으나, 이미 오래전부터, 지형적 조건으로 인하여, 아일랜드 주위가 될 것이라 추정하고 찾아 왔다. 그리고 그 위치의 서해(대서양)에서의 전략적 위치, 즉 이곳 주위를 지나가는 모든 선박을 감시할 수 있는 위치이기 때문에, 아신왕이 기를 쓰고 회복하려 한 것이다.
다행히도 이곳 주위에는 로마군이 401-410년 사이 철수한 이후, 아일랜드에서 건너 온 사람들이 왕국을 세웠다. 그래서 Irish pirates raids, Pictish raids, Saxons의 진출로 로마군의 Britain 철수를 설명하는데, 이는 부분적인 설명으로 그칠 뿐이다. (아래 지도 참조).
End of Roman Rule in Britain, 383-410 (source : Wikipedia)
오히려 아일랜드의 Niall of Nine Hostages일화가 더 설득력을 가진다고 본다. 그리고 411년 죽었다는 Niall왕의 이야기가 412년 죽은 광개토태왕 이야기가 아닌가 한다. 또한 Niall왕의 아들이 429-516년 기간동안 지배했다는 기록이 한 세대로 보기에는 너무 길다는 아래 기록이 있는데, 이는 장수왕의 경우와 유사하다. 즉 주위 상황 이야기가 관미성의 위치의 신뢰도를 높혀준다는 것이다.
However, the early annals record the activities of his sons between 429 and 516, an implausibly long period for a single generation,
각미성의 웨일즈 위치 확인은 매우 큰 의미의 역사를 말해 준다. 광개토태왕이 유럽, 대서양에서 활동했다는 것이며, 고트족의 유럽 정복역사를 뛰어 넘는 역사를 말해 준다. 역사는 아무리 감추고 왜곡하려 해도 결국 드러난다. 이것이 본 글이 주는 시사점이다. 동서양 역사학자들 모두 각성하시라고 말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