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왕건의 해상세력에 대해 글을 쓰면서 하나 언급하고 싶은 것이 있어 펜을 들었다. 다름 아닌 철륵에 대해서이다. 아래 글을 보면 남당서에 철륵은 동이의 하나라고 기록되었다.
"아래 자료에서는 고려 왕건이 흑수, 달고, 철륵 등 여러 제후국을 거느렸다는 것을 보여 준다. 흑수는 흑수말갈이 있는 지역, 달고는 말갈부족으로 후백제와 일리천에서 싸울 때 고려편에 서서 싸운 민족, 철륵은 정령, 고차의 후신으로 귀방(주나라시기)이라 불리는 튀르크계 흉노의 일종이다.
"대상(大相) 유금필(庾黔弼)과 원윤 관무(官茂)·관헌(官憲) 등에게 흑수(黑水)·달고(達姑)·철륵(鐵勒: 발해의 철리부) 등 제번(諸蕃: 여러 제후국)의 정예 기병(勁騎) 9,500명을 거느리게 하며..." 《고려사, 태조 19년 9월 8일》|
또한 왜, 탐부 (탐라국?), 환어라, 철륵 등 동이의 나라들이 고려에 속국이 되었다. 왜, 탐부, 환어라, 철륵을 동이의 한 부분으로 보고 있는 점이 눈에 띈다.
"고려의 왕건(王建)이 신라와 백제를 격파하니, 왜(倭)ㆍ탐부(耽浮)ㆍ환어라(驩於羅)ㆍ철륵(鐵勒: 발해의 철리부) 등 동이(東夷)의 여러 나라(諸國)가 모두 두려워하여 고려의 속국이 되었다." 《남당서 권 18, 고려조》."
(자료: 필자의 글 '왕건의 해상세력은 누구인가?' 일 부 발췌, 인용출처 : 필자의 티스토리 블로그 (lostcorea))
또한 철륵은 고려의 속국이 되었다 했다. 그러면 철륵은 어디에 있었는가? 아래 두산백과 자료에서는 수나라때 아랄해, 카스피해 북쪽의 중앙아시아에 있었다 한다. 당나라 때에는 동돌궐 등과 관련이 있다 한다. 그런데 이들이 고려의 속국이 되었다. 그리고 철륵이 중앙아시아에 있었으면, 현재 중공을 중국의 위치로 본다면, 동이가 아니라 서융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남당서에는 분명히 동이의 하나라 했다. 그리고 고려의 영역이 중앙아시아까지 되어야 기록에 일치하는 것이다. 그런데, 현재 고려는 한반도와 재야사학자들은 동북3성 정도 포함하고 있다. 모두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 아닌가? 중공도 한반도의 사학자들도 모두 허구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수(隋) ·당(唐) 왕조의 중국인이 돌궐(突厥) 이외의 투르크계(系) 여러 부족을 일컫던 말.
정령(丁零) ·고거(高車)의 후신(後身)이다. 튀뤼크(Turuk)의 음사(音寫)일 것이다. 오늘날 튀르키예계 민족을 튀르크(Turk)라고 하는데, 이것은 ‘Turuk’라는 말이 단축된 것이다. 수(隋)나라 때에는 바이칼호(湖) 남쪽에서 아랄해(海) ·카스피해(海) 북쪽에 걸친 지역에 분포해 있었다. 돌궐에게 정복되었으나 그 일부족인 설연타(薛延陀)가 630년 당나라 군사와 협력하여 동(東)동궐을 일시 와해시켰다. 646년 당나라의 공격을 받아 육도독부(六都督府) ·칠자사주(七刺史州)로 나뉘어 당나라의 지배를 받았다. 682년 동돌궐의 부흥과 더불어 당나라에서 독립, 동돌궐에 항복하고 예속상태에 들어갔으나, 그 일부족인 위구르가 744년에 동돌궐을 멸망시켰다."
상기 자료에서 철륵은 동돌궐에 예속되다가 744년에는 위구르에 속한 것으로 묘사되는데, 필자는 위구르가 북해 위에 있었고, 당나라는 북해에 접해 있었다는 글을 쓰며, 현 중공의 위치가 중국 역사의 위치가 아님을 주장했다. (아래 자료 참조) 위구르, 동돌궐, 철륵은 지금의 유럽의 북해 위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아래 나무위키 자료에서 발해 철리부 자료를 보자. 속일본기에서는 발해와 철리부가 서로 다른 별개의 국가처럼 일본에 각각 사신을 보내고, 누가 상석에 앉느냐로 경쟁할 정도라 하였다. 즉 발해와 철리부가 가까이 있는 존재라는 것으로 판단된다. 현재 사가들의 비정에 의하면, 동북아로 비정한 발해와 중앙아시아에 있는 철리부가 가까이 있는 것이 된다. 이것이 말이 되는가? 합리적인 추론인가? 속된 표현으로 엉터리이다. 모두 거짓을 감추고 있다.
발해에 이어 요나라, 고려에서도 귀속영토로 언급된다. 발해와 요나라 고려가 중앙아시아에 있던지, 철륵이 동북아시아에 있어야 한다. 현재 사가들은 이것도 저것도 아닌 모순된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앞서 말갈 부족의 당 조공이 줄어든 이유는 발해의 건국 때문이다. 발해(고왕 시기 추정)는 철리말갈의 땅을 정복하고 철리부를 세웠으며, 앞서 언급된 불열, 월희말갈 역시 발해의 영토에 편입됐다. 발해의 부(府)로 편입되면서 불열말갈은 동평부, 월희말갈은 회원부로 이름이 바뀌었는데, 철리말갈은 솔빈말갈(솔빈부)과 더불어 부(部)였을 때의 이름을 유지했다.
철리부가 일단은 발해에 소속되긴 했지만 이는 간접적 복속에 그치고 여전히 큰 독립성을 유지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예를 들어 일본 사서 속일본기에는 779년에 '발해'와 '철리부'가 마치 서로 다른 나라인 것처럼 별개의 타이틀을 달고 일본에 사신을 보내기도 했고, 발해 사신과 철리인 사신이 일본 조정에서 윗자리에 누가 앉느냐를 두고 경쟁할 정도로 발해에 순순히 복종하지 않는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자리 가지고 이런 자존심 다툼을 한 것을 보면 발해인 주류와 철리부는 서로 상당한 지역감정, 경쟁심을 가지고 있었던 듯 하다..........
926년 발해가 요나라에게 멸망한 뒤에 철리부라는 이름을 철리주(鐵利州)로 고쳤다. 『요사』에서는 철려(鐵驪), 『고려사』에서는 철륵(鐵勒)·철리국(鐵利國), 『금사』에서는 철려와 철륵이라는 이름으로 나타난다. 철려는 월리독(越裏篤), 부아리(剖阿裏), 오리미(奧裏米), 포노리(蒲奴裏)와 같이 오국부(五國部)의 일원으로, 각 국부는 모두 요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했다.
철려는 발해의 옛 땅에서 빈발한 발해부흥운동 세력과 충돌을 빚었다. 995년 철려가 올야국 오소도와 발해 연파에게 침략당하자 요나라의 명을 받은 해족 왕 화삭노(和朔奴)가 철리를 지원해 오소도 등을 토벌했다. 이후 올야국 백성들을 잡아다 요나라에 바치는 식으로 부흥운동에 훼방을 놓았다.
11세기 여요전쟁이 한창일 때 철리국은 고려와 거란 양국에 사신을 보내며 중립 외교를 펼쳤다. 고려 현종은 일방적으로 조공을 받기만 하지 않고 1019년에는 답례차 철리국에 사신을 파견하기도 했다. 고려와 철리국 양국간의 밀접한 관계는 고려 덕종 즉위 초반인 1033년까지 이어졌다."
또한 철륵의 자료를 살펴 봄으로써 필자는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철륵이 동동궐 등의 북유럽에 있다면, 그리고 발해와 철륵이 일본에 사신을 보내 서로 자리 싸움 했다면, 그리고 발해 철리부가 있고, 고려가 이들을 속국으로 다스리고, 요나라가 이 지역을 빼았았다면, 북유럽 지역을 발해가 통치했었고, 나중에는 철륵이 독립적 위치를 가졌다는 추정, 그리고 고려도 이 지역을 통치했으며, 요나라와 고려가 이 지역에서 전쟁을 했다는 것이다. 이는 그동안 북유럽 지역에 대한 발해, 고려, 중국의 역사가 모호했었는데, 정리를 해준 느낌이다. 앞으로 이를 바탕 삼아 추가적인 연구가 기대된다.